친구는 삶과 예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란다. 어떤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고 살아가는가? 그것은 삶이 지닌 빛깔에 개성까지 선명하게 나타낸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를 두 번째의 나, '제이오(第二吾)'라고 한다는구나. 41년 전을 기억못하는 나의 그 언저리에 회상을 준 친구가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가?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낭송하던 두 번째의 내가 있으니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인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그대로 전달해줄 수 있는 친구가 있으니 어찌 오래 살지 않겠는가? 그리고 나도 너를 분명히 기억해 냈다. 건강하고 순수했던 너의 그때 얼굴과 건장했던 체격을.
너의 소중한 기억으로 나는 41년 전에 낭송했던 그 시를 다시 공부하게 되었단다. 그리고 아름다운 청춘의 시인과 가장 우리를 다정하게 안아 주시던 그 어머니를 더 그리게 되었어. 41년을 묵어서였는지 그 진심이 전달되어서였는지 제1회 윤동주전국시낭송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단다. 개인의 역사로는 부끄럽고도 감사한 일이 되었고 시낭송가가 되었단다.
나에게 많은 영향과 조언을 해 주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베르테르의 슬픔’은 자신의 세 가지 개인적 체험인데 연애, 친구의 실연과 자살, 인간과의 교섭이었다 하는구나. 경험의 재구성이었다고나 할까. 괴테는 본인의 사건들을 연결하여 베르테르의 비극을 창조한 것이었지. 그리고 단순히 실연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적 통념을 깨고 인간 본연의 감정과 해방된 심정으로 정열이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냈던 거란다. 그리고 젊은 자기의 내면생활을 유감없이 토로했던 거였지. 작품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건 바로 경험으로 나온 스토리의 구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경험했던 이야기들, 우리가 만들어 낸 추억의 스토리가 있는 너의 이야기가 바로 예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편하고 대화하듯 나오는 네 이야기야말로 나에게는 한없이 아름다운 노래란다. 서울에는 도도하고도 가슴 떨리는 한강의 강물과 서예를 가르쳐 주시고 늘 나를 지켜주신 스승 소헌 정도준 선생님의 경복궁의 현판과 남대문 상량문이 있단다. 나는 그 둘을 사랑하고 그 둘은 늘 나를 위로해주고 큰 힘을 준단다. 내 감성을 다시 일깨워준 너의 편지에 답하는 것도 우리를 더 기쁘고 늠름하게 할거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시인 셸리는 ‘겨울이 온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고 노래했었지. 세월이 가도 나이를 더 먹어도 기승전결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니 길고 가느다랗게 살아도, 언제 영원한 이별이 오더라도 만나면 깊은 포옹을 하는 그런 제이오(第二吾)가 되어 보자. 두 번째의 나여!
[백승훈의 첫번째 편지- 그리운 기억 하나 ]
[별헤는 밤]
그 날은 하늘이 유난히도 파란 탓에 밤이 더 깊어 보이던 날이었어. 1982년 가을을 지나는 어느 휴일이었을 거야. 땀냄새 풀풀 나고 조금은 거칠고 꾸밈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군인들의 감성을 마구 흔들어 재낀 위인이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노ᆞ익ᆞ희'. 귀엽고 수려한 외모에 목소리 또한 더없이 낭랑하던 그가 회식을 빌어 자행되는 고참들의 그들만의 유치찬란한 자유와 짖궂은 장난들을 잠재우며 낭송한 시는 윤동주의 '별헤는 밤'이었어.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막사의 밤하늘을 울려 퍼지던
그 길고 긴 시와
그 시를 담아내던 익희의 청아하고 호소력있는 목소리는 그들을 한 순간
감성의 바다에 빠뜨리기에 충분했지. 참으로 대단했어.
당차고 야무지고 분명한 그녀석은 군대에서도 자신의 색깔을 자연스럽게 펼쳤던 거야. 32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탱탱하고 개구장스러운 눈빛과 발그레한 미청년의 볼을 잊을 수가 없네.
나의 그리운 기억 하나였어.
우리 친구들도 그립고 소중한 기억들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며 살고 있겠지?
익희에 관한 기억 둘은 며칠 있다 들려줄게 친구들아~^^~
[백승훈의 두번째 편지- 그리운 기억 둘]
[ 몸을 날려! ]
아침부터 분주하고 바빴어.
등짝이 뜨끈뜨끈한 것이 아마도 1983년 5월 중순이었던 듯 싶어. 일년 가까이 기상과 함께 구보(웃통을 벗고 뛰게 하는 가죽 구보포함)를 마치고 품세와 대련으로 쌓아왔던 기상을 펼치는 날이었어.
그놈의 군대는 이상하게 영하 십 몇도씩 내려가는 겨울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가죽 구보를 시켰단 말이지^^
후끈한 열기가 살갖이 파래지던 지난 겨울의 새벽을 벌써 그리워하게 만들었던 날이었지.
일년에 한 번씩 치르는 사단의 큰 행사인 이름하여 국기원 승단 심사!
사단 직할대 전 병력이 모여 하루종일
뜨거운 기운을 쏟아내는 날!
수 백명이 모여있는 크나 큰 연병장은 그것만으로도 장관이었어.
그것 참,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내 대련 상대는 곱상한 눈매속에 강인함을 숨겨 둔 그 이름하여 '노익희'
심사석이 넓직히 네 곳에 위치해 있고
차례를 한참이나 기다리다 우리는 세번 째 대련장으로 들어갔어.
"겨뤄!"라는 구령과 함께 둘은
고삐가 풀려 난 소들처럼 들러붙었어.
익희가 먼저 그 긴 다리로 앞 뻗어 올리기로 기선을 제압하려 들었지. 질세라 난 가볍게 물러 나면서 허리숙이며 물레방아 돌려 차기를 시도했어. 그리고는 누구랄 것도 없이 치고 돌리고 이단 날아 올라 가위차기에 뒤돌려 차며 질러 들어 가기를 셀 수 없이 하며 무아지경에 빠질 찰라 "그쳐"하는 심판관의 고함 소리에 정신차리고 돌아보니 모두들 우리 둘을 쳐다보고 있었던 거야.
우리는 서로의 실력에다 이름모를 울분과 어떤 절박함까지 섞어서 전력을 다해 대련을 했던가봐. 우리 때문에 양쪽 대련 팀들이 밀려나는 통에 본의 아니게 둘의 대련장이 되었던 거지. 사회에서의 운동을 인정받은 익희는 4단에, 난 엉겹결에 몇 단계를 수직 상승하여 공인 2단을 부여 받았지.
땀에 흠뻑젖은 등을 서로 안아주며 기뻐하던 그 날이 뭉클 뭉클 생각나네^^
지금도 눈에 선해. 어이없는 듯 웃던 국기원 심사관도 어렴풋이 기억나고 말야.
그리운 익희의 두 번째 기억이었어. 친구들아~ 꽃바람에 가슴들 잘 추스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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